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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위한 기록

세계사 속 경제사(돈, 성, 권력, 전쟁, 문화로 읽는 3000년 경제 이야기) - 김동욱

  많은 사람들이 피라미드는 노예를 부려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오해다. 실제로는 어느 정도 보상을 받는 일종의 임금 노동자들이 만든 것이라는게 학계의 정설이다. 스핑크스를 건립할 때 석재덩어리를 채석하는 원정대에겐 직급별로 배분되는 빵과 맥주의 상세한 배분 기록이 있다. 인솔자 1명이 빵200개에 맥주 5단위를 받았고 석재조각공 20인 각각 빵 30개에 맥주 1단위, 채석장인 1인이 빵 15개에 맥주 60분의 47단위 식으로 배급됐다.

 

 로마제국의 멸망 후 이슬람 세력이 커지면서 동방과의 교역선이 끊겼다. 그 결과 유럽은 자급자족 경제로 쇠퇴하게 된다. 남아 있던 극소수의 무역선을 통해 동방에 내놓을 만한 것도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어려울 빤 아니라 수지타산도 맞지 않는 노예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가자 지방의 특산이었떤 와인 수입이 끊겼고, 오일도 더 이상 아프리카에 수출되지 않았다. 실크도 더 이상 구경할 수 없게 되면서 최고위층까지도 소박한 옷을 입었다. 그리고 동방과의 해상 교역이 쇠퇴하면서 직업 상인은 사라졌다. 상인도 비정규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문제는 주화의 액면 가치는 그대로 둔 채 크기와 함량을 줄이는 '장난'을 쳐서 동일 양의 금속으로 더 많은 화폐를 만들어냇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결과 화폐가치 하락이 꾸준히 발생했다.52년 은 함유량이 100퍼센트에 가까웠던 로마의 은화는 68년 은 함량이 90퍼센트로 줄어들었고, 211녕넨 50퍼센트로 떨어졌다. 화폐가치 하락의 법칙은 중세시대에도 게속 관철됐다.

 

 16세기 중바 유럽에 들어온 튤립은 1634년이 되면 테덜란드에서 튤립광풍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반적으로 확산됐다. 최고위층에서 부터 가장 빈곤층까지 튤립 투기에 뛰어들었고, 그 결과 튤립 가격은 끝이 없이 치솟았다. 튤립 광풍의 전성기인 1637년 3월에는 튤립 한 송이의 가격이 숙련공 연봉의 10배 이상에 달했다.

 

 중세시대엔 원칙적으로 이자를 받는 것이 금기시돼어 있었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에게 정직하게 일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신의 영역인 시간을 가지고 장난치면서 부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리대금업자의 이익은 고리대금 업자가 뭘 하든 사오간없이 쉼 없이 축적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자와 금융은 유럽 전반적으로 퍼져나갔다. 피렌체 상업은 금융도시로 유명했다.

 

 역사적으로 독일은 말 그대로 돈이 휴지조각이 돼버리는 것을 온몸으로 경험한 나라다. 제1차 대전 직전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는 파운드나 프랑, 리라화에 비해 매우 안정돼 있었다. 하지만 패전으로 인해 상황은 변했따. 패전에 따른 전쟁배상금 지불을 위해 대규며 재정적자가 불가피해졌다. 그 결과 1차 대전 이전에 1파운드는 20마르크 선에서 교환됐지만얼마 지나지 않아 파욷느당 185마르크까지 폭락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달러당 1000만 마르크까지 떨어지고 달러당 42억 마르크까지 폭락했다. 싸구려 옷엔 5000만 마르크까지 가격표가 붙었다. 사실상 화폐가 의미없게 돼버리고, 쓰레기에 불과해지자 독일 경제는 물물교환 상태로 돌아갔다. 담배나 보석, 예술품 등 사치재는 빵, 음료 등을 사기 위해 사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