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살이 될 때까지 나는 카르멘이라는 소녀에게 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풋사랑도 해 보지 못했다. 나는 나보다 어린 녀석을 시켜서 카르멘에게 편지를 한 통 건네주었는데, 거기에다 그 아이에 대한 나의 사랑을 고백했다. 그 사랑을 구실 삼아 데이트를 청했던 것이다
십오 분 동안 나는 미치광이처럼 그녀 집까지 뛰어갔다. 그곳에 다다르자 그녀가 식사를 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땀에 흠뻑 젖은 채 철책 앞에서 십 분 동안 기다렸다. 그러나 반대로 고동은 더욱 심해졌다. 나는 그대로 가버릴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몇 분 전부터 이웃집 창가에 한 여인이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내가 문 앞에 숨어서 무엇을 하는가 알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녀는 나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게 했다.
그 불은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리고 또한 그녀가 나처럼 몸 한쪽이 뜨거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한쪽으로 몸을 돌리는 걸 보는 것 또한 좋았다. 그녀의 조용하고 진지한 얼굴이 원시적인 불빛 속에서보다 더 아름답게 보인 적은 일찍이 없었다. 방 안에 불빛이 퍼지지 않고, 그 불은 한쪽에서 활활 타고 있었다.
나는 마르트를 원망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고마워하는 얼굴을 보고서 육체 관계에 어느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이전에 그녀의 육체를 눈뜨게 해준 남자를 저주했다. 마르트에게서 처녀성을 보아 온 것이 바보 같은 짓으로 여겨졌다.
본능은 우리들의 안내자다. 그 안내자는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 간다. 어제 마르트는 임신이 우리를 서로 갈라 놓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일찍이 그런 적이 없을 만큼 나를 사랑하는 오늘에 와선 나의 사랑이 자기 사랑처럼 깊어진다고 믿었다.
불행은 조금도 인정되지 않는다. 오직 행복만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 이별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면서 용기를 보인 것이 아니다. 단지 뭐가 뭔지 몰랐던 것에 불과하다. 자기 죄의 판결을 선고받는 사형수처럼 나는 의사의 결정을 멍청히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죽었다는 확실한 사실은 내 사랑과 그 사랑이 지닌 모든 끔찍함까지 함께 나에게 드러내 주고 만 것이다. 아버지가 울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흐느껴 울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나를 두 손으로 잡았다. 눈물 흔적도 없이 메마른 두 눈으로 어머니는 성홍혈 환자를 다루는 것처럼 냉정하나 다정하게 나를 돌봐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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