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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위한 기록

한국전쟁(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한국전쟁 발발 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국을 둘러싼 대내외 상황) - 박태균

그런데도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시켜야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더 이상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 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미군이 소련군과 함께 한반도에 주둔한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신탁통치를 실시할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따. 그런데 한반도에 정부가 수립되었다. 비록 통일정부가 아니라 남과 북으로 나뉜 두 개의 정부라 할지라도 어쨌든 한국인들로 구성된 정부가 수립된 것이었다 그리고 1948년 말 소련군이 철수했다. 그러니 미군이 주둔 할 명문이 사라진 것이다

정치, 사회적으로 보아 1948년 대한민국은 매우 허약했다.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ABC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다. 정부기구가 만들어지고 미군정으로부터 재산 및 행정권을 이양받았지만,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돈 물리력, 통치 이데올로기 중 어느 하나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없었다.

미국은 전쟁이 발발한 지 1주일도 안 돼 일본에 있는 공군과 육군을 한반도에 파견하였다. 전쟁 기간 중 한반도에 파견된 미군은 40만 명이 넘었다. 중국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은 직후 한반도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국공내전에 참가했던 중국 거주 한국인들을 포함하여 약1백만명이 파견되었다. 소련군은 공식적으로 참전하진 않았으나 전쟁 물자를 지원했고, 공군이 부분적으로 참전하였따. 소련의 공군 전투기들은 미군 전투기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을 넘지 않도록 제지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소규모이지만 해상의 기뢰 제거 작업에 참여한 일본은 미국의 병참기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차 세계대전까지는 주로 상륙작전과 함께 전차를 앞세우고 진군하는 전략을 썼다. 태평양전쟁 때는 포격 후 상륙하는 작전을 폈는데, 이는 공군이 아니라 해군 함정을 이용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에서는 좀 더 새로운 전술이 도입되었다. 전투기 폭격으로 먼저 초토화시킨 다음 진군하는 작전이다. 발전한 공군력을 이용한 전술이 도입된 것이다. 또한 병참기지와 보급로를 끊는다는 명분으로 전선이 아닌 후방 지역에도 폭격을 했다.

전쟁 발발 소식이 워싱턴에 알려졌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미주리 주에 있는 사저에 머물고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도 메릴랜드 교외의 농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발빠르게 대응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유엔에서 한국전쟁 문제를 논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할 결의안을 작성하였다. 트루먼이 워싱턴에 도착하기 전에 이결의안은 안전보장이사회를 통과하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가 계속되면서 곧 끝날 것만 같았던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는데 있었다.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미군은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주둔 지역에 네이팜탄을 비롯한 온갖 폭탄을 쏟아부었다. 거기에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 중 하나인 포항에서는 미 해군의 함포사격 때문에 더 잇아 진격이 어려웠다. 북한군이 오히려 뒤로 밀릴 수도 잇엇다. 그때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애초에 미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대해서 비관적인 결론을 내렸다. 인천 지역의 조수간만 차가 너무 크고, 인천 앞바다에 있는 월미도를 비롯한 섬들이 장애물이 될 수 있따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상륙작전은 3~4시간 정도의 밀물 대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미군은 노르망디에서, 태평양의 수많은 섬에서, 그리고 필리핀에서 상륙작전을 벌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사령관 맥아더는 2차 세계대전 중 수많은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인물이었따. 인천상륙작전에는 261척의 함대와 미해병대 1개 사단, 육군 7개사단 등 총 7만 5천 명의 병력이 투입되었다.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논쟁은 전선을 만주로 확대할 것인가, 핵무기를 사용할 것인가였다. 두 가지 모두 맥아더 사령관이 제기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유엔군이 수세이 몰리자 멕아더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두 가지 극한 처방을 내놨다. 하나는 중국의 보급선인 동시에 퇴각한 북한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있던 만주 지역에 폭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맥아더가 제시한 두 번째 처방은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회담장에서 서로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싸움이 오가는 동안, 남북한군과 유엔군 그리고 중국군의 젊은이들은 38선 주변의 고지 위에서 수없이 다치고 죽었다. 군사 전략상 중요한 고지라는 이유만으로 이들은 기어올라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 속에서 생명을 잃었다. 1951년 9월 13일부터 한 달 동안 강원도 양구군에서 계속된 '단장의 능선'전투에는 탄약 70만발, 항공기 출격 842회, 폭탄 250톤이 퍼부어졌다. 이 전투로 유엔군은 597명이 전사하고 3천여 명이 부상했으며, 공산군은 1500여 명이 전사하고 7천여 명이 부상했다. 정말 이 고지 하나가 2천여 명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