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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위한 기록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 저녁의 해후

그녀는 처음으로 시어머니의 적나라한 노구에 연민을 느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시어머니의 문 앞에서 되풀이한 살의에 대해 구차한 변명이나마 하고 싶어졌다. 내가 정작 죽이고 싶었던 것은 저분이 아니라 저분의 노망, 아니 저분의 이물감이었어. 그녀는 시어머니의 노구를 향한 연민보다 훨씬 진한 연민을 시어머니가 아파트를 처음 보고 느꼈을 그 엄청나고 고독한 이물감에 대해 느꼈다. 실상 그것은 그녀의 자위의 한 방법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위로받지 못한 이물감이라고밖엔 표현할 길이 없는 간밤의 충격을 그렇게라도 해서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 울음소리

 

 나는 허둥지둥 안방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어슴푸레 어둡고, 창문은 열려 있고, 남편은 요도 안 깔고 모로 누워서 곤히 잠자고 있었다. 나는 불 먼저 켰다. 남편은 꼼짝도 안했다. 성한 쪽을 아래로 하고 모로 누운 남편은 영락없이 죽은 사람이었다. 나는 황급히 남편의 몸을 만져보았다. 보통 때도 성한 쪽보다 온기가 덜한 불편한 쪽은 밤바람에 섬뜩하도록 차게 식어 있었지만 성한 쪽은 따뜻했고 숨소리도 평온했다. 나는 요를 깔고 그를 안아다 눕히고 포근한 명주이불로 감쌌다. 그래도 불편한 쪽의 죽음이 온몸으로 퍼질까봐 불안해서 그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평소엔 한 이불 속에서 살만 잠깐 스쳐도 기겁을 하게 싫던 불수의 반신을 온기가 돌아올 떄까지 정성 들여 주물렀다. 그 반신이나마 있음으로 해서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눈물겨웠다.

- 저녁의 해후

 

 병원에서 밤새도록 울었다. 의사나 간호사까지 나를 동정했고 나는 무엇보다도 시어머니의 그 경건한 의식을 받을 면목이 없어서 눈물이 났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희색이 만면했고 경건했다 다음에 아들을 낳았을 때도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똑같은 영접을 받았을 뿐이다. 그분은 어디서 배운 바 없이도 저절로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분이었다. 그분이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그분의 여생도 거기 합당한 대우를 받아 마땅했다. 나는 하마터면 큰 일을 저지르 뻔했다. 그분의 망가진 정신 노추한 육체만 보았지 한때 얼마나 아름다운 정신이 깃들었었나를 잊고 있었던것이다. 비록 지금 빈 그릇이 되었다 해도 사이비 기도원 같은 데 맡겨 있지도 않은 마귀를 내쫓게 하는 수모와 학대를 당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해산바가지

 

 그러면서도 홀연히 내가 한 번도 주를 가까이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병원에서 내가 매일매일 기뻤던 것은 주님을 가까이해서가 아니었다. 우리보다 못하고 우리보다 불행한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처지를 우위에 올려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쁨이 그분으로부터의 은총이었다는건 중대한 착각이었다. 우리보다 못한 사람의 불행을 즐긴 데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가장 야비한 기쁨으로 착각할 수 있었을까.내 이웃의 고통이 나에겐 그렇게도 맛있었단 말인가 - 사람의 일기

 

 "이름이 뭐냐?"

 나는 개에게 직접 물었다. 네가 아무리 재주가 만힉로소니 말이야 못 하겠지 하는 유치한 심보였으니 그야말로 개가 다 웃을 지경이었다.

"퍼얼."

"진주."

개 대신 지교수와 복녀 여사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이나 퍼얼, 퍼얼, 내 새끼 우리 귀염둥이, 아이고 예쁜것 하면서 혀 짧은 소리로 수선을 떨고 나서야 복녀 여사는 조촐한 다과상을 내왔다. 나는 유자차를 다 마시고 나서 건더기까지 씹으면서 염치없는 소리를 했다.

- 비애의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