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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위한 기록

뻬드로 빠라모(민음사 세계문학전집) - 후안 룰포

그 여자가 다시 나에게 인사했다. 그때서야 나는 뛰노는 아이들과 비둘기 떼와 파란 지붕을 보지는 못했지만 마을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귀에 들리는 것은 정적뿐이었는데, 이는 내가 아직 그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 머릿속이 이미 세상의 소음으로 가득 차 있는 탓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녀의 초췌한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첫눈에 봐도 무척 어렵고 힘들게 살았던 흔적이 역력했다. 얼굴은 핏기가 없이 창백하고, 눈자위가 움푹 들어간 눈은 형체조차 분간하기 힘들었다. 손가락은 꺼칠꺼칠하고 마디마다 주름살이 깊게 패어 있었다. 낡은 흰옷은 말이 의상이지 천 조각을 덧댄 넝마나 다를 바 없고, 목에는 성모 마리아 구호소의 메달이 달린 목걸이를 걸고 있었는데, 메달에는 '죄인들의 안식처'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래요,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모두들 그렇지 않던가요? 여기로 갔다 저기로 갔다, 나중에는 멀리 떠나서 아예 돌아오지 않잖아요. 그분도 이곳을 떠나려고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을 거예요. 모르죠, 어쩌면 당신에게 나를 맡겼는지도. 들소 이야기를 한 것도 떠날 기회를 붙잡은 그분이 만들어낸 적당한 구실이에요. 당신도 그분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다시는 되살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면 마치 자루에서 쏟아져 나온 알갱이를 다시 담고 싶은 것처럼 또 다른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까닭이었다. 부친의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몰고 오고, 피를 부르는 죽음은 희생자들의 몰골을 차마 누늗고 볼 수 없게 만들었다. 하나같이 피투성이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얼굴, 짓이겨진 눈, 크게 부릅뜬 채 증오에 불타고 있는 눈빛...... 그들의 모습은 그의 노리에서 지우고 또 지운, 나중에는 더 이상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당신의 죽음 앞에서 바락바락 알을 쓰며, 당신을 체념하고자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 당신이 원하던 바였으니까. 그런데 그날 아침은 즐거웠던 것일까? 그날 아침에는 덩굴나무 이정표를 부수고 열린 문으로 들이닥치던 바람이 있었어. 그때 이미 나는 다 큰 처녀였지. 바람만 불어도, 참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저 언덕에 나풀거리는 이삭 꽃만 쳐다봐도 가슴이 부풀어 올랐지. 그러나 당신이 세상을 떠난 날, 나는 당신이 재스민 꽃잎 사이를 휘젓는 바람의 장난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저 밝은 세상을 놔두고 당신의 눈이 감겨야 한다는 현실이 못내 안타까웠어. 당신은 왜 눈물을 흘리려 했을까?

나는 다시 돌아왔어. 늘 다시 돌아오던 그 바다로. 바다가 밀려나고 있어. 내 발목을 적시던 바다가 저만치 밀려나고 있어. 나의 무릎과 나의 허벅지를 적시던 바다가, 보드라운 두 팔로 나의 허리를 안고 가슴을 어루만지던 바다가, 어꺠까지 차오르며 목을 휘감던 그 바다가 멀리 밀려나고 있어. 나는 그 사람의 품속에 안겨 있어. 영원히. 나는 격렬한 소용돌이에 휩싸인 채, 온몸을 내맡긴 채 격랑의 물결 위를 떠다니고 있어.

나는 그 사람에게 말했지. '바다로 나가고 싶어요.'

그러나 그 사람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

나는 다음 날에도 바다에 있었어. 그 물결에 온몸을 내맡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