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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및 전쟁사

만주사변3 / 일본의 금주 폭격 / 일본의 하얼빈 정복

금주는 지금의 진저우시

관동군 비행대 12대는 봉천 비행장을 이륙하여 금주 상공에 침입했다 그리고 25kg의 폭탄 75발을 투하했다. 이번 폭격의 목표는 정치적인 의미도 있었다. 일본 본토 정부의 평화정책을 깨버리기 위함이었다. 이 폭격은 중국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여러 나라는 금주 폭격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미국, 영국 정부는 그 폭격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 또한 별다른 제지를 보이지 않았다. 일본은 참 운이 좋았다. 이런 세계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일본은 안심했다. 그리고 결국 일본 본토 정부에서 만주에 1개 사단을 추가로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그에 추가로 조선군 제19사단과 나고야에 있던 공군 1개 중대도 급파했다. 28일 관동군 제2사단은 금주에 대한 진격을 시작했다.

 

중국군 지휘관 장학량(장쉐량)

 관동군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군대까지 증병 하였다 왜냐하면 관동군은 금주에서 엄청나게 치열한 전투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장학량이 금주 주둔군을 철수했기 때문이다. 장학량은 군대를 모두 화북성으로 철수시켰다. 

 

하얼빈

 장학량의 중국군이 금주를 포기하고 이에 따라 관동군은 금주에 무혈입성했다. 관동군의 다음 목표는 하얼빈이었다. 원래 관동군은 하얼빈을 치려고 했었는데 러시아의 눈치를 보느라 공격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얼빈에서 반일 움직임이 계속돼서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1932년 관동군은 하얼빈으로 북상했다. 하얼빈에 도착한 관동군은 즉시 공격을 시작했다. 하얼빈의 정초 군은 시가지 전으로 관동군에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수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단련된 전쟁광 관동군을 이길 수 있는 부대는 만주에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치열한 전투 끝에 하얼빈 수비군 정초는 새벽을 틈타 철수했다.

 

결국 하얼빈은 일본군의 손에 넘어갔다.

 

 일제강점기의 역사책을 읽다보면 안타까운 점이 참 많습니다. 그중 하나는 일본군에게 여러 행운이 따랐다는 것입니다. 질 만한 전쟁에서 이기고, 서구 열강의 관심이 없을 때 타이밍 좋게 점령하는 등.. 이러한 조금조금의 행운과 승리가 일본 제국주의에 따랐습니다. 한두 번 중요한 전쟁에서라도 일본 제국주의가 졌다면 일제강점기는 그렇게 길지 않았을텐데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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