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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및 전쟁사

만주사변2 I 만주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전쟁 I 흑룡강전투 I 관동군 I

  만주에서 벌어진 난리가 일본 육군 중앙부에 알려졌다. "북대영의 중국군이 만철선을 폭파했음......" 이 전보처럼 관동군은 사건을 만주군이 일으킨 것으로 거짓보고했다. 

 

흑룡강성은 지금 헤이룽장 성이다

 남만주 일대로 쳐들어간 관동군의 다음 목표는 북만주였다. 일본 본토 정부는 관동군의 무력행동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부룩하고 관동군의 폭격기가 만주군의 금주를 폭격해버렸다. 일본 미나미 육상은 이 사건을 축소하려고 했으나 관동군은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폭격에 이에 관동군은 교통상의 최대 요충지인 치치하얼을 먹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장학량의 금주정권은 흑룡강성의 주요 부대를 치치하얼에 배치했다. 그리고 흑룡강군은 전투태세를 갖추고 철교를 파괴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단순히 수비만을 목적으로 파괴했던 철교가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건 바로 관동군의 침입 빌미를 준 것이다. 왜냐하면 그 철교가 일본의 이권이 개입돼있는 철로가 지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특산물이 이송되는 곳으로 500만엔의 손실을 입게 됐다. 관동군은 흑룡강성을 침입할 명분을 얻게 됐다. 하지만 일본 본토 정부는 언제까지나 전쟁이 아닌 대화를 통해 해결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먹히지 않았다.

 

일본 관동군

 11월 4일 드디어 흑룡강군과 관동군 사이에 전투가 시작됐다. 일본군의 진격로 앞에서 흑룡강군의 포병은 포진을 가다듬고 일본군이 사정권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집중포화를 퍼부었고, 관동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포병도 없이 쳐들어온 관동군은 매우 심각한 피해르 입었고 후퇴했다. 그리고 전의를 가다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은 불리했다. 흑룡강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흑룡강군이 가지고 있는 독일제 대포의 성능과 사격술도 관동군을 뛰어넘었다. 

 

혼조 사령관

 그 후에도 수차례 전투가 계속됐다. 흑룡강군의 강력한 방어에 관동군 제16연대는 그로기 상태에 빠졌고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다. 결국 혼조 사령관은 전선에서 퇴각을 명령했다.

 

 그동안 관동군에게 지기만 해왔던 중국측에겐 단비와 같은 승전이었다.

 

 하지만 근성의 관동군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본토에 끊임없이 지원요청을 했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리고 18일 새벽, 관동군은 제2사단을 동원하여 일본 본토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전투를 시작했다. 새벽부터 공격을 받은 흑룡강군은 치치하얼 일대에서 치열한 방어를 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결국 방어선이 무너졌다. 관동군은 19일 저녁, 바라고 바랬던 치치하얼을 손에 넣었다.

 

치치하얼을 둘러싼 전투에서 관동군은 180명의 사상자와 동상자 1000명의 피해를 봤다.

 

 목표를 얻어내기 위한 일본의 집착은 어마어마 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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