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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위한 기록

갈리아 전쟁기 - 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 전체는 세 지역을 나뉜다. 한 지역에는 벨가이인, 다른 한 지역에는 아퀴타니인, 나머지 한 지역에는 그들 스스로를 켈타인이라고 부르고 라틴어로는 갈리아인이라고 부르는 민족이 살고 있다. 세 지역 모두 언어, 제도, 법률이 서로 다르다. 갈리아인은 남쪽으론 가론 강을 사이에 두고 아퀴타니인과 분리되고, 북쪽으론 마른 강과 센 강을 사이에 두고 벨가이인과 분리된다. 세 민족 중 가장 용감한 민족은 벨가이인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프로빈키아의 문화와 문명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상인들이 성품을 유약하게 만드는 일용품을 가지고 출입하기가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며칠 동안 베손티오에 머물면서 식량과 군수품을 준비했다. 그러는 사이에 갑자기 지독한 공포가 아군 전체에 퍼져 병사들의 사기와 의욕을 크게 떨어뜨렸다. 우리 병사들이 질문에 갈리 아인과 상인들은 게르만인들이 엄청나게 키가 크고 강하며, 믿을 수 없을 만큼 용감하고, 무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룬다고 설명했다. 어떤 자들은 전투에서 게르만인과 마주 섰을 때 그들의 험한 인상과 강렬한 눈빛을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다고 떠들어댔다.

 

 그들이 도착하자 전세는 아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군 병사들은 심지어 부상을 입은 자들까지도 방패로 몸을 지탱하며 다시금 힘을 내 싸우기 시작했다. 종군 노예들까지도 이제 두려움에 떠는 쪽이 네르비족임을 보고는, 무기를 갖지 않은 몸으로 무장한 적을 공격했다. 기병대 역시 패주의 치욕을 씻기라도 하듯 모든 곳에서 군단병을 능가하는 용맹함을 보였다.

 

 이 사건에 대해 보고를 받은 카이사르는 갈리아인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염려했다. 그들은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고 늘 정권이 변하기를 갈망한다. 또한 카이사르는 어떤 경우에도 갈리아인의 말을 믿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튿날 아침에 카이사르는 보병과 기병을 3개 부대로 편성한 다음 패주한 적을 추격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이 병력이 상당한 거리 전진하여 적의 후미를 포착했을 때, 퀸투스 아트리우스가 보낸 전령이 말을 몰고 카이사르에게 달려왔다. 

 

 브리타니아의 내력 지방에는 구전에 따라 그들 스스로 선주민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반대로 해안 지방에는 한때 약탈과 전쟁을 위해 벨기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의 부족들이 원래의 부족과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바실루스는 카이사르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로마군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빠른 진군으로 무장하지 않은 자들과 아직 들판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자들을 생포했다. 생포된 자들이 전해준 정보에 따라 바실루스는 암비오릭스가 소수의 기병과 함께 머물고 있는 장소로 즉시 진격했다. 모든 일에서 특히 군사적인 문제에서는 운이 매우 중요하다

 

 카이사르는 다음 날 세노네스족의 도시인 벨라우노두놈에 당도했다. 그는 후방의 적을 제거하고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도시를 포위하고 이틀 동안 공성용 참호를 준비했다. 그러자 사흘째에 사절이 찾아와 항복을 선언했다.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무기를 모으고 말을 끌고 나오고 600여 명의 인질을 넘기라고 명령한 다음,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부장에가 나머지 과정을 맡겼다. 그리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카르누테스족의 도시인 케나붐을 향해 행군을 계속했다.

 

내전기 - 율리우스 카이사르

 

내전기 - 율리우스 카이사르

 카이사르가 9일에 걸쳐 공성 공사를 절반가량 끝마쳤을 때 집정관들과 첫 번째 병력을 싣고 디카리움에 당도했던 배들이 브룬디시움 항으로 되돌아왔다. 폼페이우스는 즉시 이탈리아로 떠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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