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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위한 기록

황야의 이리(민음사 세계문학전집) - 헤르만 헤세

 만족한다는 것, 고통이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어떤 고통도 환희도 외쳐대지 않고 모든 것이 그저 속삭이면서 발끝으로 살금살금 움직이는 이런 움츠린 날들은 견딜 만하다. 다만 유감스러운 건 바로 이런 만족이 내게는 좀처럼 견딜 수가 없고, 시간이 흐르면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혐오스럽고 구역질이 나서 절망적으로 다른 대기 속으로 ㅡ 가능하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불가피한 경우에는 고통을 겪더라도 ㅡ 도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자살자들> 중에는 무척 강인하고 의욕적이고 대담한 천성을 가진 자들이 많다. 그러나 조금만 감기에 걸려도 금방 열이 펄펄 끓는 체질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살자>라고 부르는 몹시 예민하고 민감한 천성을 가진 사람들은 조금만 마음이 동요되어도 자살 생각에 집중적으로 빠져든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아니 결국에는 우주로 도약할 수 있기 위해서 황야의 이리는 언젠가는 자기 자신과 마주 보고 서서, 영혼의 혼돈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인식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의 의심스러운 존재가 완전히 불변하는 모습을 드러날 것이고, 나아가 충동으로부터 감상적이고 철학적인 위안으로, 그다음엔 다시 이 위안으로부터 이리의 본성에서 나온 맹목적인 도취 상태로 재삼재사 도피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인간과 이리는 기만적인 감정의 가면을 벗고 서로 인식하고, 발가벗은 채 서로의 눈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둘은 분열되어 영원히 뿔뿔이 갈라져서 더 이상 황야의 이리는 존재하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유머의 타오르는 불빛 속에서 계약 결혼을 할 것이다

 

"내가 당신의 고독을 깨뜨려 버렸고, 당신을 지옥문 바로 앞에서 건져내어 다시 눈을 뜨게 한 겁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길 원해요. 가만 계세요. 잠자코 들어보세요! 당신은 나를 무척 좋아해요. 나는 그걸 느껴요.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그러나 나에게 연정을 품고 있지는 않아요.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 거예요. 그게  직업이니까요. 나는 사내들이 나를 사랑하게 만듦으로써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게 있어요.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당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나는 그녀 쪽으로 약간 몸을 굽혔다. 그때 그녀 개 나 얼굴을 크고 단단한 두 손으로 잡아당기더니 오랫동안 키스했다. 그래서 나는 침대 위 그녀 곁에 앉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매만지면서, 밖에서 들으면 안 되니 작게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그러곤 내 베개 위에 커다란 꽃처럼 놓여 있는 그녀의 아름답고 통통한 얼굴을 낯설고 놀란 마음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내 손을 가만히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더니, 곧 이불속으로 끌어당겨, 조용히 숨소리를 내는 그녀의 따스한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는 서로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고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말할 수 없는 행복 속에서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우리는 무슨 말을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으므로, 무작정 내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숨이 가빠 멈추어 설 때까지 정신없이 달렸다. 우리 둘 다 아직 유년의 나이여서,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는  그일요일 날 최초의 입맞춤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쓰다듬었고, 그녀는 수줍어하면서 또 다른 손으로 내 머리를 쓸어주었다.

 

 오오, 나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파블로를 이해했고, 모차르트를 이해했다. 나는 어딘가 등 뒤에서 그의 무서운 웃음소리를 들었다.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장기말이 모두 내 주머니에 들어 있따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시 한번 그 유희를 시작해보고, 다시 한번 그 고통을 맛보고, 다시 한번 그 무의미 앞에서 전율하고, 다시 한번 더 내 마음속의 지옥을 이리저리 헤매고 싶었다. 언젠가는 장기말 놀이를 더 잘 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웃음을 배우게 되겠지. 파블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