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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위한 기록

사랑할 때와 죽을 때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민음사 세계문학전집 / 전쟁소설 / 책소개 / 책추천)

 

뮈케는 중대장이 있는 본부로 달려갔다. 그곳은 그나마 유일하게 쓸 만한 건물로, 혁명 이전에는 아마 교황 소속이었을 것이다. 라에는 넓은 방에 앉아 있었다. 뮈케는 불이 타오르는 커다란 러시아제 난로를 증오에 찬 눈길로 쳐다보았다. 난로 곁 의자에 라에가 기르는 셰퍼드가 누워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뮈케가 보고를 마치자 라에는 즉시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고요를 깨고 마차가 덜컹거리며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곧 말 한마리가 질주해 오는 것을 보았다. 말은 불안해 보였고, 그림자를 보고는 두시발로 멈추어 서려 했다. 사나운 두 눈과 뻥 뚫린 콧구멍을 가진 말은 창백한 달빛 아래 무심쉬하고 기괴한 느낌이었다.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은 앞발을 높이 들었다. 말의 주둥이에서 거품이 튀었다. 그들은 말이 지나가도록 폐허 쪽으로 몸을 비켜야 했다.

 

쪼개지고 덜컹거리고 찢어지고 쏴쏴거리고 쾅 하며 터지는 폭음이 들려왔다. 내려치는 듯한 거대한 주먹이 지하실을 진공 속으로 내던져, 몸에서 허파와 위장이 터져 나가고 혈관에서 피가 뿜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윙윙대는 최후의 암흑과 질식이 덮쳐 올 것 같았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그 대신 갑자기 불이 들어왔다. 소용돌이치며 타오르는 불은 마치 불기둥이 바닥으로부터 솟아로는 것 같았다. 하얀 횃불이었다. 한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마지막 공습이 있던 날, 이 거리에도 여러 차례 폭탄이 떨어졌다. 정면만 남아 있던 그 집도 이번에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폐허 가운데서 신문 역할을 하던 그 문짝은 조금 떠러진 곳의 폐허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그래버는 머리가 돌아 버린 공습 경비원이 어찌 됐을까 궁금해했는데 마침 그 당사자가 맞은 편에서 다가왔다

 

그는 게슈타포 건물로 들어가 호출장을 제시했다. 친위대원은 복도를 지나 연결된 부속 건물을 가리켰다. 복도는 서류와 환기되지 않은 사무실과 막사의 냄새를 풍겼다. 그는 이미 세사람이 대기하고 있는 방에서 기다려야 했다. 한 사내는 안마당을 향한 창가에 서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등 뒤로 돌리고 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쪽 손등을 피아노 치듯이 두드렸다.

 

러시아군의 경전차가 돌진했다. 보병들이 그 뒤를 따라 함께 돌진했다 중대는 전차들을 그대로 통과시키고 뒤따르던 보병들에게 십자 포화를 퍼부었다. 달아오른 기관총의 총신에 병사들의 손은 화상을 입었다. 그들은 쏘고 또 쏘았다. 러시아군의 대포는 이미 그들을 포격할 수 없었다. 전차 두대가 방향을 틀어 굴러 오더니 포격을 가했다. 어차피 반격도 할 수 없는 일방적인 게임이었다. 기관총으로는 전차를 상대할 수 없었다. 병사들은 틈새를 향해 사격을 했다. 하지만 그런 시의 사격은 소발로 쥐잡기였다. 사격을 뚫고 나온 전차들이 포격을 가하자 진지가 진동하고 콘크리트가 갈라졌다.

 

저녁이 되자 보충병 한 명이 포로들의 식사를 가져왔다. 저녁 식사는 점심때의 콩 수프에 물을 탄 것이었다. 보충병은 포로들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발을 가지고 돌아갔다. 보충병은 담배도 가져왔는데, 다른 날보다 더 많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쁜 징조였다. 식사가 더 좋아지고 담배가 더 많이 지급된다는 것은 어려운 전투가 임박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