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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위한 기록

박완서 단편소설(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 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

젊은 여자는 좋은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을 받은 똑똑한 여자로서 매사에 완전한 걸 좋아했다. 비뚤어지거나 모자라거나 흠나거나 더럽거나 넘치는 걸 참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의 행복이라는 데 대해서만은 대단히 융통성 있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행복한 사람에게도 한 가지 근심이 있게 마련이라는 게 그것이었다. 늙은 여자는 젊은 여자의 바로 이 한 가지 근심이었다. 젊은 여자는 늙은 여자를 한 가지 근심으로서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제발 웃지만 말고 뭐라도 좀 그래봐요. 제가 왜 여기 온 줄 아세요. 선생님의 변명을 들으러 왔단 말입니다. 왜 침묵을 못지켰나 뭐라고 좀 변명을 해보세요. 선생님. 그때만 해도 제가 너무 기고만장했든지 순수했든지 선생님의 변명을 들어드릴 아량이 전혀 없엇지만 지금은 아녜요. 그걸 듣고 싶은 아량이 생겼단 말입니다. 네, 선생님. 말씀해보세요. 변명을 해보세요. 변명이 싫으면 증언이라도...... 제 아량을 위해, 아니 제 비열을 위해 제발 뭐라고 한마디 해보세요." 노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노인의 입에서 무슨 소리든지 짜내기 위해선 우선 저 무진장 흘러 내리는 웃음부터 막아야할 것 같았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손을 떨면서 서둘렀지만 어디를 어떻게 틀어막아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뭐라구요? 백수회라구요? 날더러 그 배수횐지 백 살까지 살고 싶어 환장한 노인들의 명령횐지의 뒤치다꺼리를 하라구요? 당신 아버지 이제 육십이에요. 백 살을 사시면 도대체 앞으로 몇 년을 더 사시겠단 소린 줄 앙세요? 자그마치 사십 년이란 말예요. 그래서 하루도 안 거르고 매일 산에 오른다, 약수를 퍼마신다. 극성을 떨었던 거예요. 아유 지긋지긋해. 아유 내 팔자야."

외간 남자와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감미로운 도취감이 그녀의 정상적인 분별력을 마비시켰던 것 같다. 형선은 자신이 좋은 남편의 사랑받는 아내란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본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내부에 깊이 파인 빈자리를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형선은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과 성실한 남편을 두고도 외간 남자와 밀회를 즐기고 싶어하는 자신을 특별히 음란한 여자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오랫동안 밀봉해놓은 공허감을 들여다본 느낌은 역시 공포스러웠다.

오늘따라 시아버지는 그녀의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인사가 끝난 후에도 인터폰을 끊지 않았다. 어른이 통화를 끊기 전에 먼저 끊어선 안 된다는 예절에 길드여진 그녀는 수화기를 든 채 시아버지의 침묵에 귀를 기울였다. 시아버지의 침묵은 처음이었다. 처음엔 다만 곤혹스러웠지만 차츰 뭔가가 들여오는 것 같았다. 사람 사는 것의 덧없음, 늙어가는 일의 쓸쓸함, 사람마다 숨겨놓은 고독의 두려움, 그런 어둑시근한 것들이 그 침묵 속에서 우울하게 웅성대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거역하기 위해 안간힘 쓰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아가, 외롭쟈?" 침묵 끝에 들려온 이 한마디는 처음 들어보는 시아버지의 육성이었다. 귓전에 생생하게 숨결과 체온마저 느껴지는 이 한마디 육성이 무거운 추처럼 그녀를 곧장 그 깊이 모를 어둠으로 끌어들였다. 그녀는 그 속으로 끌려들어가면서 실로 오랜만에 편안감을 맛보았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너무 잘해드리면 여기서 아주 눌러사시려고 하실지도 모르잖아요. 그건 약속이 틀려요. 난 맏며느리로 시집온 적 업승니까요. 당신도 그렇죠. 당신이 부모 덕 본 거 뭐 있수? 시골 사람들 뻔뻔한 건 하여튼 알아줘야 한다구. 낳아만주면 단 줄 알구 자식 덕 볼 생각부터 한다니까."

"이게, 그냥 말이면 다 하는 줄 알아."

"이런 바보 같이 온종일 그 걱정하고 있었구나, 걱정 마. 우리 어머니는 닭장 속에서 단 열흘도 못 견디실 테니까. 아파트 그게 닭장이지 어디 집이야. 우리 어머니는 순수한 시골 사람이시거든. 열흘도 못 돼 시골로 도로 가시겠다면 그때 가서 붙드는 척이나 하라구. 너무 열렬하게 붙들진 말구. 우리가 당신을 영영 닭장 속에 가둬놓을 줄 아시면 육층에서 투신자살도 마다 않을 분이니까."

"정말로?"

윤경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돌았고 그도 괜한 걱정을 했다 싶게 마음이 한결 개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