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및 전쟁사

중일전쟁4 / 우한전투 / 장제스 / 일본군 우한 진격 / 충칭으로 후퇴 / 일본군 / 전쟁사 / 역사 /

 

 

 1938년 6월  일본은 카이펑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고 거침없이 중국 국민당을 쫓아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중국 내부로 진출하기 위해서 교통을 장악하려 했고 수만 병력의 이동을 가능하게 해줄 철로 연선을 하나하나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일본군은 한커우(우한) 점령을 시도 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우한은 장제스 정부의 수도로서 심장부입니다. 우한이 일본군에게 넘어갈 경우엔 국민당의 재정상태 악화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한의 점령은 조세가 끊기는 것입니다.장제스에게는 경제적으로 매우 큰 악영향을 미칩니다. 우한은 중국의 마지막 산업 중심지입니다. 

 

 일본군이 우한을 점령하기 전에는 먼저 정저우를 점령해야 했습니다. 정저우의 경우엔 동서를 이어주는 철도와 남북을 연결하는 철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국 내륙을 점령하려는 일본군에게는 반드시 점령해야 할 도시였습니다. 국민당 입장에서는 정저우가 점령 될 경우에 우한과 시안 등의 거점 도시가 넘어갈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명재경각의 상황이라고 할 만합니다. 

 

 

 

 

 장제스가 일본군의 우한 공격을 막기 위해 또는 지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황허강을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치수를 위해 황허강에 제방을 쌓았었는데 이 제방의 대부분은 정저우 근처에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육로로 우한에 진격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이 제방을 터뜨리면 일본군의 진격을 잠시나마 막을 수 있습니다만 제방 주역의 거주민은 엄청나게 고통을 받습니다. 장제스의 독일 군사고문과 청첸이라는 사령관은 중국의 군사력으로는 일본군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제방을 터뜨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장제스는 제방을 터뜨리지 않으면 우한은 얼마 안가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고 우한에서 충칭으로 철수를 하지 못해 일본군에게 추격당하면 중국은 결국 일본군에게 함락된다고 판단했습니다.그래서 결국 장제스는 제방 폭파를 명령합니다. 제방 폭파로 엄청난 물이 민가로 들이닥쳐 많은 마을과 농민들이 희생됐다고 합니다. 약 90만명의 중국 국민이 희생되고 480만명이 수재민이 됐다고 합니다.

 

 

 

 

실제로 제방 파괴로 일본군은 우한으로 진격을 조금은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근데 이 시간은 굉장히 짧습니다. 근본적으로 일본군의 진격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황허강의 범람으로 일본군은 육로 진출은 어려웠습니다. 그 대신 해군의 지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중국군은 맹렬하게 저항했지만 당시 최고 기술의 일본 해군의 포격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고 합니다. 

 

 일본군은 후쭝난의 도시들을 점령하고 신양에 일본 국기를 꽂았습니다. 우한 함락 또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장제스는 우한이 일본군에게 곧 점령 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고위 장성들에게 우한을 떠나 충칭으로 향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한 역시 일본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우한전투는 일본군이 광동 공략전과 함께 수행한 것입니다. 광동을 포함하여 중국군의 요충지인 우한을 점령해 중국 대륙을 모두 점령하려는 일본군의 의도였습니다. 일본군은 우한을 점령하기 위해 약 3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편성했습니다. 이에 대비한 중국군의 방어군 역시 약 60만에 가까워 우한 전투는 중일전쟁중 가장 최대 규모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일본군은 제11군을 주력부대로 우한 공략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함대 10척도 동원했습니다. 일본군은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우한을 점령하기 위해선 암석으로 된 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중국군은 이 지형지물을 이용해 일본군을 끊임없이 사살했습니다. 어떤 곳에선 일본군의 시체가 골짜기를 메울 정도라고 합니다. 장제스의 중국군은 지형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아주 효율적으로 일본군을 사살했습니다. 거기에 고온다습하고 강우량도 많아 일본군은 굶어죽거나 괴질 등 풍토평에 걸려 피해를입는 병사들도 너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일본군의 전진은 끊임없었습니다. 해군과 항공대의 지원을 받아 우한의 방어진을 점령하고 요새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한을 손에 넣었습니다. 우한 전투로 일본군의 병력손실은 약 3만5000이 넘었고 중국군의 사상자 또한 10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중국군은 우한에서 철수하여 충칭으로 이동했습니다.

 

중일전쟁3 / 타이얼좡(태아장) 전투 / 쉬저우전투 / 국민당정부 / 장제스 / 일본제국주의 / 전쟁사 / 역사

 

중일전쟁3 / 타이얼좡(태아장) 전투 / 쉬저우전투 / 국민당정부 / 장제스 / 일본제국주의 / 전쟁사

 1937년 장제스는 중국의 여러 대도시가 모여있는 우한으로 총사령부를 옮겼습니다. 우한폐렴 할때 그 우한입니다. 우한은 국민당을 상징하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우한은 한커우, 우창, 등의 여�

fortitudecaesar.tistory.com